Umberto Eco와 Carlo Maria Martini의 공개편지를 엮은책.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무엇을 믿을것인가?라는 문제에대하여 서로 토론을 벌이는 그런 책은 아니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와 추기경이 특정 주제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계기로서, 또는 서로간의 이해의 차를 좁히기 위한 계기로서 – 나누는 그런 책이라고 말해야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단연 돋보이는 것은 Eco의 문제 제기 방법이다.
독창적인 문제해석과 치밀한 논리, 충분한 근거, 상대방이 오해할수 있는 여지는 미리 제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방식.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정도 학식을 채우고, 어느정도 겸허한 마음을 지니고, 어느정도 연습을 해야만 저런 표현이 가능하게 될까?
Eco의 책을 읽을때마다, 그가 이야기 하고자하는 논지를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심히 소원한 일일듯 싶다.
각 대목별 인상적인 대목들을 정리해본다.
내가 인상깊에 바라본 화자들의 논지 전개 방식을 1, 2, 3 의 개요를 써서 정리하고, 그 아래 예로 들 수 있는 문장들을 적어보았다. .
첫번째대화
새로운 묵시록에 대한 세속의 강박 관념 – 움베르토 에코의 편지
에코씨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은 가히 천재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갈때 아래와 같은 전개방식으로 논지를 만들어 간다.
1. 하고 싶은 이야기의 범위를 좁힌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예의를 갖춰 제거한다.
왜 자신은 그것이 불필요 한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충분히 설명한다.
2. 본인의 생각의 범위를 좁혀가며 나누고 싶은 대화의 열쇠를 정한다.
이야기의 범위는 좁히되 사소하거나 편협해 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희망 – 미래에 대한 책임 -의 개념이 존재합니까? …. 종말론이 미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생각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비판적인 기능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희망은 종말을 <궁극 목적>으로 바꾼다. –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의 편지
추기경은 추기경 다운 자세와 논조로 커다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반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세세한 사실에 반박할 것이 아니라, 큰 그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 어설프게 상대의 이야기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대응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방향을 환기시킨다.
두번째 대화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 움베르토 에코의 편지
- 상대의 존재의 기반과 그 논리를 깨려고 하지 마라. 다만, 자신은 그들과 다른 사상위에 서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도 인정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줘라. - 그리고,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지는 지점에 대한 상대의 판결이 아닌 생각을 물어라.
“우리 중의 대다수는 돼지 멱따는 걸 생각할 때는 몸서리를 치지만, 햄을 먹을 때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저는 풀밭의 지네를 밟아 죽일 생각은 없지만, 모기들에 대해서는 난폭하게 굽니다. “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합니까?”
“저는 당신의 판결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논의에 관하여 비평과 설명을 해주십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명이 바야흐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것이다. –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의 편지
-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 세세한 사안에 대한 이기고 지는 논쟁이 아닌, 자신의 근본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라.
- 상대의 이야기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배경에 깔린 숨겨진, 혹은 드러난 진짜 이야기, 진짜 문제점, 진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라.
“신약성서에 중요하다고 가르친 것은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생명이라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 제가 보기에는 당신의 많은 단언 속에 그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이 있습니다. 당신의 주장에는 누구나 한 인간 생명의 운명과 대면 할 때마다 느끼는 고민과 불안이 나타나 있으니까요.”
세번째 대화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본 남자와 여자. – 움베르트 에코의 편지
- 공격을 할때는 확실하게 상대가 어려워 할 지점을 꼬집어서 도전하라.
“여자들의 사제직을 금하는 교의적인 근거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역사적인 이유라든지, 신자들이 아직 사제는 곧 남자라는 생각에 길들어 있다라는 식의 상징적 접합성이 문제가 되는 거라면, 교회를 재촉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변화해 가면 될 테니까요 – 하지만…. 기약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기다림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비를 찬양한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견강부회하지 않는다.
바뀌어야 할 것은 인정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 하지만, 상대의 주장에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논리 전개와 기본 전제들에 대하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필요는 없다.
“종교적인 원칙이나 행동들을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외부로부터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 만일 과거에 오늘날과는 다른 조건에서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공감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강제들이 존재했다면, 어떤 종교든 그런 잘못을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네번째 대화
비신앙인은 어디에서 선의 빛을 찾는가? –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의 편지
- 자신의 믿음에 기반하여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커다란 질문을 던져라.
소소한 것에 집중하여 논쟁할 필요는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경에서 비신앙인에게 무엇이 윤리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윤리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보편 타당한 정연명령에 기대려 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 행동의 확실성과 당위성을 어디에서 구합니까?”
“도덕 규범의 절대적인 가치가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어떤 인격신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면, 이타주의, 성실, 정의, 연대, 용서와 같은 규범들이 상황의 여하를 막론하고 어떻게 오래오래 버티어 나갈 수 있을지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 – 움베르트 에코의 편지
- 상대가 가장 중요하고 근간이다라고 믿는 수준의 커다랗고 근원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상대가 근본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줘라. 하지만, 그것이 상대의 믿음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신념과 논리도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그쳐라.
- 그리고 나서는 서로 믿음의 방향은 다르나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라. 그리고 서로가 공통되는 생각을 다른 모습으로 가지고 있음을 공유하라.
“인류의 어떤 문명들에서 학살과 식인 풍습과 타자의 육체에 대한 모욕을 용인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문명들이 야만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타자>의 개념을 부족 공동체 또는 민족에 국한 시켰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심자군 병사들은 이교도를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타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욕구를 타인들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류의 천 년에 걸친 성장의 결과 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계명조차도 그것을 위한 때가 무르익고 나서야 비로소 표명되고 어렵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타자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것만으로 윤리적 행동을 위한 절대적인 토대, 확고 부동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해 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절대적인 근거라고 부르는 그것조차도 신앙인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 신앙인들은 죄를 짓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죄를 짓게 된다고 말입니다.”
참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과 사상의 토론을 접한 기분이다. 읽고 또 읽고.
머지 않은 날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 책이다.
.淳.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마땅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